자산 현금화로 리스크 최소화 한다

"가격을 낮춰서 내놓아도 사겠다는 사람이 안 나타나요. 제일 덩치 큰 자산이 매매가 안 되니 아주 갑갑해 미칠 지경입니다." 투자자문업을 운영하는 A씨는 목동의 30평대 아파트를 처분하려고 매물로 내놓았으나 거래가 이뤄지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쉰다. 매도호가를 떨어뜨린다고 해서 매수세가 나타날 상황이 아니라고 그는 최근 시장 분위기를 전한다. 가격이 더 떨어지기 전에 현금을 확보해야 하는데 전반적으로 거래가 실종되자 다급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는 국내외 주식형펀드와 개별 종목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최근 모두 현금화한 상태다. 변액연금도 주식 비중을 최대한 줄이고 채권형으로 전환했다. 주식과 펀드를 처분한 자금을 일단 CMA에 예치해 둔 그는 시기를 저울질 해 채권에 투자할 계획이다.

국제유가와 미국 증시의 향방에 따라 국내 주식시장이 급등락을 보이자 일부 투자자금으로 파생상품을 거래하는 것이 A씨가 투자하는 위험자산의 전부다. # 은행에서 일하며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고객 자산관리와 저술로 왕성하게 활동중인 B씨. 그는 고객들에게 공격적인 베팅보다 방어적인 전략에 집중할 때라는 메시지를 전하는데 여념이 없다.

지금은 자산을 늘리기보다 지키는 데 치중해야 할 때라는 얘기다. B씨 역시 위험자산을 대부분 현금화 했다. 방어주 중심으로 개별종목을 보유하고 있었고 국내 주식형펀드와 중국펀드, 원자재펀드 등 다수의 펀드에 투자하고 있었으나 최근 모두 환매해 현금을 확보한 것. 인구구조를 근거로 부동산시장의 장기적인 추세에 대해 비관적이었던 그는 최근 국내외 경기 둔화가 뚜렷해지자 보유한 주택도 처분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위험자산을 과감하게 던지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일반 투자자가 아니라 재정자문을 본업으로 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타난 움직임이라는 데서 눈길을 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국내외 증시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일관되게 유지해 온 한 리서치센터장도 위험 자산을 현금화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관심을 끌었다.

◆이번 위기, 여느 때와 다르다

2004년 이후 주식시장이 몇년에 걸쳐 상승세를 보일 때도 위기는 있었다. 급등에 따른 '건강한 조정'도 있었고, 글로벌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움직임과 인플레이션 우려가 나올 때마다 '패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급락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미국 발 신용위기와 경기 둔화는 강세장 속의 위기와 다르다는 것이 자산을 현금화 한 이들의 판단이다.

"지난해 3분기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상한 뒤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리를 공격적으로 내렸지만 미국의 시중 유동성이 늘어나지 않고 있어요. 동시에 부동산 가격은 계속 떨어지고 있죠. 과거 일본의 장기 불황 때와 흡사합니다. 당시에도 감세와 금리인하를 단행했지만 유동성은 늘어나지 않고 자산 가격은 장기적으로 떨어졌죠." 목동 A씨의 판단이다. 통화완화정책의 효과로 시중 유동성이 늘어나는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위기의 본질 자체가 다르다는 지적이다.

즉 강세장 속에서의 증시 패닉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와 금리인상에 따른 유동성 위축 우려였지만 이번에는 인플레이션이 우려가 아닌 현실로 나타났고 주가 하락의 원인이 단순한 유동성 위축이 아닌 자산 가격 하락과 그에 따른 소비 및 경기 위축의 악순환에 있다는 얘기다. A씨는 올 들어 국제 유가가 지나치게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다우존스지수가 펀더멘털 측면에서 의미 있는 지지선이라고 여겼던 1만2300선 아래로 밀리는 모습을 지켜본 후 현금을 확보할 때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전했다.

◆부동산 대출 건전성, 한국도 안전하지 않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을 남의 나라 일로만 보고 넘길 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2001년쯤 볼보를 구입했어요. 그 때만 해도 거리에서 외제차 보기 힘들었죠.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 외제차가 부쩍 늘었어요. 국내에서 굴러다니는 외제차의 수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차종도 미국의 비버리힐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모델이 눈에 띄어요. 그동안 사람들 수입이 그만큼 늘었을까요. 그게 아니라 집값이 오르니까 레버리지를 일으킨 것이죠.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한 것과 외제차 수가 늘어난 기간이 거의 정확하게 일치해요."

빚을 내서 아파트만 구입한 것이 아니라 그밖에 사치품들을 늘렸다는 얘기다. 그런데 부동산시장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금리마저 상승하고 있으니 그 여파가 실물경기와 부동산 대출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보다 장기적으로는 인구구조 문제를 빠뜨릴 수 없다. B씨는 베이비부머의 은퇴를 계기로 부동산시장이 장기적인 하향 곡선을 그릴 것으로 내다봤다. "노후 준비가 부족한 이들은 은퇴를 하면 아파트를 줄이거나 전세로 옮겨야 할 겁니다. 그런데 20~30대가 그 물량을 다 소화해 줄 수 있나요. 그동안 가격이 많이 오르기도 했고 연령이 내려갈수록 인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현재 가격에 그 물량을 다 소화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유가 하락에 속지 말라

국제 유가가 하락할 때면 미국 증시가 반등하고 이어 국내 주가도 오름세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흐름일 뿐 추세 전환으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다. B씨는 "경기 둔화가 가시화된 데 따라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는 것이라면 반길 일이 전혀 아니다"라며 글로벌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의 경우 중기적으로 다우존스지수 1만선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주식투자의 대표적인 성공 원칙으로 장기투자가 꼽힌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A씨는 장기투자가 결코 능사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끝이 언제쯤 나올 지 모르는 터널 속이에요. 그 굴곡을 다 견디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