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물렀거라! ‘가격파괴’와 ‘군살빼기’로 불황의 파고를 넘은 일본 기업들

올해 한국 경제 상황은 잿빛 일색이다. 이런 암울한 상황으로 기업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어떤 제품을 만들어, 어떻게 마케팅 활동을 펼쳐야 제대로 팔릴 것인가를 놓고 기업들은 밤잠을 설치고 있다.

이웃 일본의 기업들도 지난 1990년대 초 버블 경제의 붕괴가 시작되면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러나 일본 기업들은 10여 년 간 장기 불황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생존 비결을 터득했다. 난관 속에서도 세계 1등 제품과 히트 상품을 꾸준히 만들어 낸 것. 일본의 사례를 통해 불황기를 헤쳐 나가는 기업의 성공 전략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일본 교토는 천년 고도(古都)이자 세계적인 관광지로 유명한 도시다. 그러나 교토가 세계 1등 제품을 만들어 내는 기업들이 모여 있는 도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일본의 장기 불황 속에서 소니, 마쓰시타 등 세계적인 기업들마저 실적 부진에 허덕이고 있을 때 교토 기업들은 건재함을 넘어 성장을 거듭했다.

교토 기업의 성공 전략을 배운다

일본을 대표하는 전기·전자업체들은 1996년 이후 성장이 크게 둔화되었으나 교토 기업들은 지난 1991년부터 2004년까지 14년 간 연평균 6.7%라는 놀라운 매출 이익률을 기록했다. 특히 2001년 IT 버블 붕괴로 마쓰시타 등이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을 때도 교토 기업들의 매출 이익률은 3.4%에 달했다.

게임업체 닌텐도, 세라믹 전자부품업체 교세라, 콘덴서 제조업체 니치콘, HDD(하드 디스크 드라이브) 모터 제조업체 일본전산, 계측분석기업체 시마즈제작소 등이 대표적인 교토 기업들이다.
교토 기업들의 특징은 압도적인 세계 시장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측정기기 메이커인 호리바제작소는 엔진 배기가스 시장의 80%, 일본전산은 HDD 스핀들 모터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설립 초기 일본 시장에서 오히려 외면받고 미국 시장의 문을 두드려 성공한 전력을 지니고 있다. 일찌감치 세계 시장을 겨냥한 도전 정신이 초우량 기업을 일군 밑거름이 되었다. 시마즈제작소는 학사 출신 다나카 고이치 주임이 2002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기업으로 유명하다. 박사도 임원도 아닌 일개 주임의 연구 실적이 노벨화학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 바로 교토 기업들의 강점이다.

뛰어난 기술력은 교토 기업의 다양성과 유연성에서 나온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동질성을 지닌 ‘회사형 인간'을 요구하고 연공서열과 종신고용을 특징으로 하는 여느 일본 기업과 교토 기업들은 분명 차이가 있다.
성과주의, 유연한 고용과 조직 운용 등은 교토 기업의 특징이다.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목민형 기업'인 것이다. 교세라의 ‘아메바 경영'은 이런 유연성의 상징적 표현이다.
심지어 ‘모난 사람이 모나지 않은 사람보다 더욱 우수한 인재일 가능성이 높다'는 인재관을 지닌 회사가 있을 정도다. 집단주의를 강조하는 일반적인 일본 기업의 풍토 속에서 다나카 고이치 주임과 같은 돌출 인재가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기술자 출신의 오너가 대부분인 교토 기업들은 은행 문을 두드리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차입 경영은 교토식 경영의 또 다른 특징이다. 경기 흐름에 휘둘리지 않고 기술 연구와 개발(R&D)에 온 힘을 쏟을 수 있는 기반이 바로 무차입 경영이다.
제품 개발 후 교토 기업들은 무작정 미국으로 달려갔다. 계열 중심의 수직적 거래를 중시하는 일본 대기업들이 무명의 교토 기업들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이런 저돌적인 도전 정신이 세계 시장 1등의 바탕이 됨은 물론이다.

가격파괴 상품으로 불황의 파고를 넘는다

가격파괴는 불황기 기업 생존의 기본 조건이다. 거품을 제거하고 제조 원가를 철저히 낮춘 제품이어야 성공한다.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들은 가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장기 불황 시대에 발군의 히트 상품을 내놓은 기업 중 대표적인 곳이 의류기업 ‘패스트 리테일링'이다. 2000년대 들어 일본이 장기 불황 시대를 마감하면서 최고 경영자가 바뀌는 등 성장세가 꺾였지만 ‘유니클로'는 유통 시장의 ‘전설'이 되었다.

유니클로가 지난 1998년 내놓은 ‘폴라플리스(Polarfleece)'는 첫해 200만 장이 팔렸다. 1999년엔 850만 장, 2000년에는 1,200만 장이 판매되어 3년 간 모두 2,250만 장이 팔려 나갔다. 일본 사람 다섯 명 중 한 명이 폴라플리스를 입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폴라플리스는 폴리에스터를 주 원료로 만든 합성섬유 제품이다. 겉모양이 양모처럼 도톨도톨하고 따뜻해 플리스란 이름이 붙었다.
폴라플리스에 이어 티셔츠도 대박이 터졌다. 1999년 1,200만 장, 2000년 2,500만 장으로 2년 간 총 3,700만 장이 팔렸다. 의류시장에서 단품 판매의 신기원을 이룬 것이다.

유니클로의 이념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입을 수 있는 고품질의 베이직 캐주얼을 가장 싼 가격으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이념 중 포인트는 ‘가장 싼 가격'에 있다. 낮은 가격과 함께 캐주얼 특화, 대량 생산, 고품질 등이 유니클로 신화를 낳은 네 가지 키워드이다.
유니클로는 의류점의 패스트푸드화를 지향한다. 맥도널드가 ‘누구나 살 수 있는 65엔짜리 햄버거를 곧바로 먹을 수 있다'고 자랑하듯이 유니클로도 ‘누구나 살 수 있는 1,900엔짜리 폴라플리스를 곧바로 입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니클로의 오너인 야나이 다다시는 “상식은 과거의 유물”이라고 주장하는 업계의 이단아다.

지난 1990년대 일본은 장기 불황과 함께 원 프라이스 숍(One Price Shop)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원조이면서 대표 주자는 지난 1979년 히로시마에 처음 선보인 100엔숍 ‘다이소'. 현재 일본과 한국 등에 2,800여 개에 이르는 체인점이 있으며 지난해 매출액도 3,200억 엔을 넘어서 대형 유통업체 대열에 들어섰다.

100엔숍 다이소는 본격적인 불황기인 1994년 이후 10년 간 점포 수와 매출액 성장률이 무려 600%를 넘어설 정도로 초고속 성장세를 보였다.
100엔숍의 주종목은 생활용품이나 잡화다. 칼꽂이, 플라스틱 주방용품 등 일용잡화와 문구류, 야채, 과일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품을 100엔에 팔고 있다. 성공 비결은 저가 대량 구입. 낱개로 사면 200~300엔쯤 하는 물건을 70~80엔에 수십만 개 단위로 사들여 이를 100엔에 되파는 것이다.
불황으로 호주머니가 가벼워진 소비자들에게 100엔숍은 매력적인 쇼핑 장소가 됐다. 100엔숍도 처음에는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본사의 구매력이 약해 매장 안에 진열된 상품의 대부분이 질 낮은 상품이거나 중소기업의 재고 상품이 주종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인점이 늘어나고 본사 구매력이 커지면서 좋은 상품을 싸게 매입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100엔숍 다이소는 우리나라에도 진출, 현재 전국에 400개가 넘는 체인점이 있다. 지난해 매출액은 약 1,500억 원을 기록, 진출 첫해인 1997년 3억 원에 비해 500배 늘어나는 괴력을 보였다. 불황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100엔숍 ‘다이소' 간판은 국내 전역에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역으로 100엔숍 다이소의 확산 여부가 불황의 바로미터가 된다는 분석도 있다.

불황기에는 다이어트를 체질화하라

불황기에는 상품 개발 전략을 짤 때 ‘군살빼기'가 과감히 이뤄져야 한다. 군살빼기의 형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새로운 제품을 가급적 내놓지 않는 모델 절약형과 또 하나는 기본 기능을 강조한 기본 충실형이다.
일본의 경우 마쓰시타는 버블 붕괴 이후 불황의 골이 깊어진 지난 1993년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6,000종에 이르는 각종 가전제품의 수를 1,000종으로 줄이는 작업을 단행했다. 당시 히타치사도 TV 모델의 종류를 절반으로 줄였다.

기본 충실형도 소비자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자동차업체 닛산은 각종 부품을 40%까지 줄였다. 기본 충실 전략 아래 1992년 선보인 소형 자동차 ‘마치'는 불황에도 큰 인기를 끌었다. 엔진의 배기량을 줄이고 각종 보조장치는 과감히 생략했으며 속도감보다는 승차감에 주안점을 두었다. 가격은 당연히 낮아졌다.
발상의 전환을 이룩하면 어떠한 역경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교훈은 비단 일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기업도 일본의 노력을 거울삼아 불황을 이겨 나갈 지혜의 힘을 모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