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핑(zipping)과 재핑(zapping)

내가 가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느리다’는 거다. 길거리를 가다가 비가와도 뛰지 않으며 급한 일이 생기거나 약속시간에 늦어도 뛰어가지 않는다. 식사도 아주 천천히 하는 편이어서 “맛없게 먹는다”는 소릴 잘 듣는다. 밥을 맛있게 먹어야 잘산다며 어른들이 늘 주의를 주곤 했지만 여전히 느리다.

그 뿐 아니다. 말도 느리게 하고 크게 하지 않으며 차를 몰 때 갑자기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놀라지 않는

다. 느린 효과를 크게 보는 것이 바로 운전할 때가 아닌가 싶다. 덕분에 허둥대다가 제동을 늦게 거는 일은 거의 없어서 20년 무사고 기록을 갖고 있다. 물론 과속도 잘 하지 않는다.

반면에 생각은 늘 빠르다. 누군가 한마디 하면 그 이후 나올만한 두 세마디 정도는 바로 연상이 가능하다. 화자의 말과 표정을 동시에 읽는 능력도 (나름대로는) 탁월하다. 말하는 순간 그의 표정과 연결지어 <참과 거짓>을 구분해 내곤 한다. 그래서 결정도 빠르게 내린다. 거의 실시간으로...

이런 나에게 ‘물리적 빨리빨리 문화’가 스며들 여지가 없다. 대표적인 업종이 패스트푸드다. 얼릉뚱땅 먹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이 시대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성격상 남이 한다고 따라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나의 ‘느림코드’는 생존^^해 있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나의 이런 성격을 바꿔버릴 막강파워를 가진 굉장한 ‘고수’를 만났다.
컴퓨터가 그것이다. 88년, 처음 컴퓨터를 접했는데 당시에는 XT와 도트프린터가 전부였다. 그러던 것이 불과 2년도 채 안되서 AT 286에 잉크젯 프린터가 등장하더니 이내 386 레이저 프린터로, 486으로 진화하다가 팬티엄이라는 강력한 놈이 연이어 나를 연타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386급을 쓰다가 다른 곳에서 286으로 사용하려면 너무 느려서 성질을 돋구곤 했다. 얼른 486으로 바꿨더니 이내 팬티엄을 쓰는 다른사람의 컴퓨터를 보면 486을 쓰는 내가 답답해 보여서 또다시 팬티엄급으로 바꾸기를 여러차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인류를 성질 급하게 만들어 놓을 것이고 싸움과 투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가 삭막해질 것이고 경찰병력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걱정까지 하면서 “그래도 나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런데 엄청 느린 나도 서서히 급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성질도 나빠지는 것 같았다. 그 때마다 다시 스스로를 추스르고 다시 원상복귀 시켜놓곤 했다. 지금은 예전처럼 “엄청느린”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중에 비하면 “상당히 느린” 성격을 유지하고 산다.

각설하고, 우리는 리모콘 시대에 살고 있다. TV에 붙은 채널을 돌려가며 여유를 즐기던 시대는 이미 가고 <소파에 누워 손발을 이용해 요리조리 까딱거리며 내키는 대로 채널을 돌려대는> 이른 바 ‘재핑(zapping)’ 그리고 <광고가 나오면 즉각 채널을 바꾸는> ‘지핑(zipping)에 익숙해 진 ’빨리빨리문화‘에 얹혀 살고있다.

요즘 청소년들은 바로 리모콘 문화에 동화되어 있다. 빠르게 전개되는 버추얼 광고에 익숙하고 만화를 즐기며 장편보다 단편소설에 관심이 많다. 그런가 하면 생각도 대체로 단순해서 별다른 사고 없이 즉각 반응하기도 한다. 선동가적 기질이 있는 노무현의 대통령 만들기도 그렇거니와 ‘개똥녀’에 수천명이 리플로 성토하고 별다른 의미 없는 ‘떨녀’에 환호한다.

다큐 보다는 개그에 환호하고, 등산보다는 격투기에 열광하며 부가가치인 정보보다는 당장의 말초신경 자극제인 게임에 열중한다. 미래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며, 비전보다 당장의 수익을 선호한다. 이들에게 사색은 사치에 불과하며 기부는 가진 자의 자기만족으로 치부된다. 가치기준은 수시로 바뀌며 릴레이션쉽은 필요에 따라 만남과 헤어짐이 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청소년 문화는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국가간 문화가 다르다고 해서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고 표현하는 것은 넌센스이며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격하시키는 것 또한 옳은 종교인이 아닌 것과 같다. 국가간 문화는 엄연히 다른 것이며 세대간 문화차도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비즈니스를 할 자격이 없다.

만일 이러한 사고가 정당화되려면 딸에게 힙합을 입히지 않은 부모는 그런 상품을 팔지 말아야 하며 피어싱이 거슬린다면 그런 사업을 응당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업자들은 청소년 상품을 팔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창업에 관심이 있다면 일단 이들의 ‘지프재핑’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기호를 따라잡기 위해 상품의 라이프사이클을 초 단축으로 이어가야 하며 서비스 또한 ‘스피드 마케팅’으로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함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