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 어느 날 ‘혹시 나도 치매?’ 공포

‘깜박깜박’ 할 때마다 불안하기만 … 심각해지기 전에 예방·진단 서둘러야

늙고 죽는 일은 인간의 숙명이다.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다. 병에 걸리면 삶의 질은 급격히 떨어진다. 특히 치매·중풍과 같은 뇌 질환은 한 번 발병하면 완치가 거의 불가능하고 가족들의 고통도 크다.

CEO도 치매 공포에서 비켜갈 수 없다. 남들보다 많은 업무, 잦은 음주, 스트레스로 지친 CEO들은 ‘깜박’ 할 때 불현듯 ‘나도 혹시 치매?’라고 불안해 한다. 실제 치매나 중풍에 걸린 CEO가 회사 문을 닫는 사례도 있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실시를 앞두고 전사적으로 치매·중풍 특집을 기획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치매·중풍에 걸린 CEO들의 사례를 통해 돈이나 명성으로도 비켜갈 수 없는 치매 질환의 심각성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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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광고회사의 잘나가던 50대 부장 사에키. 수십 년간 매일 출퇴근했던 회사 인근 도시 한복판에서 길을 잃는다. 당황한 그는 부서 여직원에게 휴대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여직원이 가르쳐주는 대로 이리저리 골목을 헤매던 그는 결국 힘겹게 회사를 찾은 후 기진맥진해 주저앉는다.’

지난해 국내에 개봉됐던 일본 영화 ‘내일의 기억’의 한 장면이다. 일본의 유명한 중견 배우 와타나베 겐은 이 영화에서 치매에 걸린 50대 주인공 사에키 역을 맡아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사에키는 능력 있고 출중한 광고회사 부장이었지만 치매에 걸린 후 약속시간을 자주 잊고 길을 잃는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아내를 못 알아볼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실제 상황’이 될 수 있다. 치매란 정상적으로 활동하던 사람이 각종 뇌 질환으로 인해 지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으로 꼭 고령의 노인이 아니라도 걸릴 수 있는 병이기 때문이다.

국내의 한 60대 중견업체 A사장은 부인과 함께 해외여행을 갔다가 호텔 복도에서 방을 못 찾아 허둥댔다. 공항 수속부터 호텔 수속까지 제대로 하지 못해 부인이 모든 절차를 밟았다. 부인은 예전 같으면 당당하게 앞장섰을 남편이 이상했다.

집에서도 같은 말을 되풀이하기 일쑤고 엉뚱한 말을 하며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결국 부인은 병원으로 남편을 데려갔다. 진단 결과 초로기(60세 이하) 치매라는 결과가 나왔다. 지금은 경영에서 손을 뗀 상태고 아들이 회사를 맡았다. 그는 통원치료를 받으며 지내고 있다.

56세의 잘나가던 외국계 회사 CEO인 B씨. 국내 굴지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 유학까지 다녀온 그는 회사 안팎에서 능력을 인정 받는 사람이었다.

구조조정과 노사문제로 1년을 골치 썩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의기소침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활동적이고 열정적이었던 사람이 손을 놓고 멍하게 보내는 일이 많아진 것.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내고 집에 들어앉았다. 집에서 그가 하는 일이라곤 하루종일 TV를 보고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먹는 것. 주말 골프 모임도 통 안 나가고 혼자 고립돼 지내던 그도 가족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았다. 단순 우울증이라고 생각했던 결과는 전두엽 치매로 판명 났다.

주로 젊은 사람에게 많이 발병하는 치매의 하나로 기억력 장애보다 행동 장애가 먼저 나타나는 치매다. 집에서 엄격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사람이 갑자기 성격이 바뀌어 느슨해지거나, 남에게 신세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 수시로 돈을 꾸고 남 앞에 있는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다 먹는 등 이상 행동 장애를 보이는 게 특징이다.

삼성서울병원 서상원 교수는 “전두엽 치매는 일반 알츠하이머 치매보다 더 빨리 병이 악화되는 특징이 있다”며 “확률이 높진 않지만 한창 일하는 CEO들도 치매에 걸릴 수 있다. 가족들이 초기에 발견하지 못하면 상태는 더 악화되고 완치의 길도 멀어진다”고 말했다.

“잘 아는 직원 이름이 뭐더라”하면 치매 의심

CEO들은 치매에 관한 공포를 어떤 때 느낄까. 기자가 몇몇 CEO와 기업체 임원에게 평소 치매에 대해 어떤 두려움을 안고 있는지 전화 취재했다. 그들은 매일 치매 공포를 안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 일을 하면서 한두 번쯤은 치매에 대한 의심을 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주류업체의 50대 여성 대표 L씨는 “가끔 일을 하면서 깜박깜박 할 때 치매에 걸리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은 하지만 걱정만 할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진 않고 있다”고 말했다.

패션업체를 운영하는 40대 K사장은 “주변 어른들이 치매에 걸린 것을 보면 종종 두려움을 느낀다”며 “내 주변 40대 CEO들은 운전도 본인이 직접 하고 비서를 안 시키고 PC에 명함 입력을 직접 하면서 치매 예방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기기 전문업체의 50대 S사장은 “지난번 해외 출장 중 비행기에서 동료와 방금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인공 이름을 잊어버려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며 “약속을 자꾸 잊어 버릴 땐 혹시 치매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한다”고 밝혔다.

이 밖에 CEO들은 ▶피자를 보고 파인애플이라고 말하는 등 갑자기 엉뚱한 영어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올 때 ▶회의시간에 직원을 지명해야 하는데 매일 보던 직원 이름이 갑자기 생각 안 날 때 ▶매일 쓰던 기계 사용법이 헷갈릴 때 치매를 의심하게 된다고 전했다.

이들은 평소 걷기운동을 하거나 여행, 등산을 하고 가능한 한 긍정적 사고를 하면서 나름대로 건강 비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치매 예방을 위해 매일 다른 출퇴근 길로 다니며 뇌에 자극을 준다는 50대 은행 임원도 있었다.

뇌 의학연구 권위자인 서울대 의대 서유헌 교수는 한국 뇌학회 초대회장이다. 현재 치매치료제 특허물질을 파는 브레인트로피아 대표이사로도 재직 중이다. 평소 CEO들에게 치매 관련 강의도 많이 나가는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강의에서 만난 CEO들은 ‘최근 기억력이 떨어지고 스트레스가 많은데 이거 치매 아닌가?’라고 자주 질문한다.

손에 볼펜을 들고 있으면서 또 볼펜을 찾고 잘 아는 길인데 생소하게 느껴지고 최근에 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호소한다. 이런 경우 치매의 초기 증상일 수도 있으나 단순한 기억력 장애일 수도 있다. 평소 뇌에 너무 자극을 줘도 안 되고 너무 자극을 안 줘도 나쁘다.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치매를 유발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70대 중반의 지방 중견업체 C사장은 중증 치매환자다. 아직 회사에는 나가지만 실질적 경영은 아들에게 물려준 지 오래다. 그는 언젠가부터 어디를 가도 길을 잃고 헤매고 명절 날 손자를 앞에 두고도 “왜 손자가 안 왔느냐”고 찾는 일이 반복됐다.

가족들은 은퇴 후 갑자기 생활이 바뀌어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라고 간과했지만 상태는 갈수록 심해졌다. 병원 진단 결과 알츠하이머 치매로 판명 났다.

지방사업체 서너 군데를 운영하는 80대 D회장의 경우도 은퇴 이후 치매가 온 사례다. 그는 젊을 때부터 자수성가해 기업체를 일궜다. 가족도 화목하고 남부러울 게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억 장애가 왔다.

62세의 건축회사 E사장. 그는 자부심이 대단하고 매사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술이 문제였다. 건축 일을 하다 보니 매일 소주 2병은 기본이었던 것. 어느 순간부터 직원들 앞에서 하던 얘기를 또 하고 지시한 걸 또 지시하는 일이 반복됐다. 결국 회사 사람들이 가족들에게 권유해 병원 치료를 받게 했다.

진단을 받고 보니 코르사코프( korsakoff) 신드롬, 즉 알코올성 치매로 판명 났다. 술 때문에 특정 기억에 관련된 기능이 점점 깨져 나중엔 치매처럼 진행되는 것. 이 경우 술을 끊으면 병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세대 세브란스 정신건강병원의 김어수 교수는 “알코올은 중추신경을 억제하는 기능이 있어 술이 들어가고 깰 때 반복이 심해지면 뇌세포에 독성이 생긴다”며 “알코올 의존도가 높은 사람이 일반인보다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통계도 있다”고 말했다.

평소 음주 자리가 많은 CEO들이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다. 스트레스나 술이 치매를 일으키는 결정적 원인은 아니지만 병을 악화시키거나 앞당길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흡연·음주 따른 혈관성 치매 조심해야

CEO들이 치매 판정을 받으면 치료를 해야 한다. 치매 초기에는 병원 외래 진료를 시작으로 약물 치료를 하게 된다. 알코올성 치매나 전두엽 치매 등 증상이 가벼운 경우는 서울 소재 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하지만 증상이 심해지면 서울 근교 요양소나 시설을 찾기도 한다.

현재 국내 치매나 중풍 환자들을 위한 장기요양시설은 늘어나는 추세다. 2006년 말부터 영리법인으로 운영되는 노인전문요양시설과 노인전문병원은 현재 153개로 2년 새 2배 증가했다. 가계 부담이 없는 CEO들은 주로 시설이 좋고 서비스 질이 높은 사설 요양소를 찾는다.

주거와 의료서비스, 문화, 스포츠가 한 곳에서 가능한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요양시설로 경기도 요인시 기흥읍에 위치한 삼성 노블카운티가 있다. 실제로 이곳엔 많은 전·현직 CEO들이 생활하고 있다.

치매란 언뜻 보면 정신병과 비슷한 증상을 일으키지만 뇌의 기질적인 병에 의해 발병한다. 더 무서운 건 뇌세포는 몸의 다른 세포와 달리 일단 손상되면 재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뇌세포가 파괴되는 원인을 미리 발견해 그 원인을 제거해야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심장병, 흡연, 비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잘 나타나는 혈관성 치매는 치매 전체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데 초기에 발견하면 더 이상의 진행을 막을 수 있고 완전히 회복하기도 한다.

국내 치매 권위자 나덕렬 삼성서울병원 교수는 “머리를 많이 쓸수록 치매에 덜 걸린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된 적이 있다”며 “항상 일거리를 찾아 매사에 긍정적으로 대처하고 적당한 음주와 금연을 실천하면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