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업 이야기 - (주) 제너시스 윤홍근 회장

정말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상공의 날’ 기념식에서 프랜차이즈 업체로는 최초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한 것이다. 프랜차이즈 기업이 오해와 편견에서 비롯된 의혹의 눈초리를 벗어나 당당하게 우리 산업의 중심부로 들어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날 지역본부사장 한 명은 ‘“훈장을 받는 게 내 꿈인데 회장님이 대신 받았으니 이제 소원을 풀었다”면서 눈시울을 적셨고, 다른 많은 직원들 역시 우리 제너시스의 일원이라는 자긍심에 다시 한번 어깨가 으쓱했다. 나 또한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그 동안 정신없이 달려왔던 길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도 정상에 오른 게 아니라 중간 표지판 하나 만난 것이지만, 생각해보면 여기까지도 그리 쉽지만은 않은 길이었다.

사실 나는 대학시절 단내가 날 정도로 공부를 했다. 가정교사생활도 병행했다. 시쳇말로 원래부터 ‘범생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천성적으로 활달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즐기고 호기심도 강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잠시 접고 공부를 해야 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운 탓에 장학금을 받아야만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유가 어떻든 일단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무엇이든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으로 인해 가속도가 붙었다. 덕분에 전체수석으로 졸업하는 영광도 안게 되었다. 교수님은 학자의 길을 걷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지만 나에겐 현실의 엄청난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홀로 되신 어머니와 아직 학생인 동생들을 돌봐야 했던 것이다. 결국 ‘상아탑’을 뒤로 하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우선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사장교에 지원했다.

학사장교는 당시에 최초로 도입되었는데, 장교라서 월급도 나왔고, 리더십과 승부근성이 있었던 나로선 적성에도 딱 맞았다. 강원도 최전방에서 보낸 군 생활은 화려했다. 함께 배속된 25명의 동기생들 사이에서 ‘군단장 같은 소위’로 통할 정도였다. 동기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지역 주민들에게도 신망을 받았다. 하지만 전역이 다가오자 ‘화려한 시절’은 가고 또다시 현실의 매서운 칼바람에 맞서야 했다. ‘학사장교 1기’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생소한 ‘간판’인데다, 전역일이 대기업 취업시즌과 동떨어진 9월이었기 때문이었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기생 전체가 똑같은 고민에 빠졌다. 1기 동기생은 총 620명 정도였는데, 졸업학점이 모두 평점 3.5 이상이었고, 국가고시 합격생, 의사, 박사 등이 포함된 우수한 인력집단이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단 부딪쳐서 스스로 뚫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사장교 1기 출신들의 취업을 위해 대책위를 만들고 부회장직을 맡았다. 620여명의 성적증명서와 경력?공적사항을 들고 대기업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담당자들을 5회 이상 접촉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담당자들도 적극적인 우리 행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직장을 이미 갖고 있던 200명을 제외한 350여명이 취업에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 동기생들은 하나로 뭉칠 수 있었으며 그것은 다시 현재 사업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나 역시도 그때 첫 직장을 갖게 되었으며, 의지하거나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스스로 헤쳐 나가는 삶의 미덕을 또 한번 절감할 수 있었다.

1984년 (주)미원(현재 대상그룹)에 입사하게 되자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두 동생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나 역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고 제 몫을 한 것 같아 안도의 한숨도 나오고 스스로 대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선 잠재된 야망이 살아 있었다. 어릴 때부터 키워오던 꿈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가 서울 다녀오시는 길에 책가방과 운동화를 사 오셨다. ‘깜장 고무신’에 허리춤에 찬 ‘책보’를 등교 차림새의 표준으로 알고 있던 나로선 개벽과도 같은 엄청난 문화충격이었다. 책가방엔 어깨에 맬 수 있도록 끈이 둘 달려있고, 책을 쉽게 넣고 뺄 수 있을 뿐 아니라 도중에 튀어나오거나 흘러내리지 않도록 자물통 비슷한 것이 달려 있는 게 아닌가! 조금만 뛰어놀아도 엉덩이께로 흘러내리거나 매듭이 풀어지는 책보는 도저히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윤기까지 반지르르 흘렀다. 운동화를 보았을 때의 감격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다.

그런데 감동은 생김새에서 그치지 않았다. 가방과 운동화의 그 착용감이란! 난 아버지께 이런 물건들을 어디에서 만드는지 여쭤보았고 아버지는 회사에서 만든다고 일러주셨다. 나는 그 때 생각했다. ‘아, 회사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물건을 만드는 고마운 곳이구나. 나도 그런 물건을 만드는 회사를 가져야 겠다.’ 그 후로 내 꿈은 대통령, 의사, 판검사가 아닌 기업의 회장이었다. 어찌 보면 철부지의 유치한 논리에 기댄 백일몽일 뿐이지만, 점차 머리가 굵어 성인 그것도 월급봉투 하나로 엄혹한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할 직장인이 되었건만 그 꿈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일단 가정 형편상 회사원으로 출발했지만 내면의 목소리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꼭 기업을 운영하는 회장이 되고야 말리라.’

그래서 직장인임에도 불구하고 학사장교 동기생 4명과 함께 ‘일맥상사’라는 회사를 차리고야 말았다. 판촉물과 관련된 사업이었는데, 지금처럼 전문 홍보업체가 없던 시절이어서 아이템 자체는 신선했다. 난 미원에 계속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세부 경영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경영판단에만 간여했다.

자금은 아내가 결혼할 때 마련해온 신혼집을 담보로 조달했다. 하지만 처음 생각과 달리 회사는 점점 어려워져 갔다. 함께 시작했던 동기들과 자금문제로 마찰도 생겼다. 그러다 결국 회사 경영에 참여했던 2명의 동기가 그만두었다. 경영이라는 것은 내가 스스로 움직이면서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학사장교 2기 후배 3명을 채용해 회사를 다시 정비했다.

하지만 이미 2천만원이라는 엄청난 빚을 떠안은 후였다. 어떻게든 회사를 제 궤도에 올려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3년만에 회사는 문을 닫았고 우리 가족은 월세집을 전전하게 되었다. ‘일맥상사’는 나의 첫 사업시도였고 동시에 첫 사업실패였다. 그 때 나는 인사관리와 경영분석, 마케팅전략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는 3년간의 혹독한 수업을 받고서야 비로소 가장 기본적인 경영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첫 사업에는 실패했지만 병행한 회사원 생활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난 입사할 때부터 경영자의 시각과 마인드를 갖자고 다짐했다. ‘사장의 눈엔 이 기획안이 어떻게 비칠까?’ 늘 이런 고민을 하면서 일을 했다. 때문에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고 윗사람에게 인정도 받게 되었다. 덤으로 ‘과장 같은 신입사원’이라는 별명도 얻었고 말이다.

입사 후에 처음 맡은 업무는 사료곡물 수입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구매업자들은 곡물판매상을 상대할 때 값을 무조건 깎고 보자는 식으로 나갔다. 나는 그 관행을 과감히 버리고 가격을 절대 깎지 않는다는 전략을 세웠다. 언뜻 들으면 망하기 딱 좋은 전략이지만, 오히려 깎기에만 집착하는 것이 ‘소탐대실’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나름대로 마련해 둔 복안은 의외로 간단했다. 사료곡물을 구입할 때 값을 깎지 않는 대신 고급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사료에 쓰이는 곡물은 주로 옥수수나 소맥 등인데, 그 생산량과 가격은 수출국의 기후변화나 정치? 경제적 상황 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는 정보를 미리 수집해서 가격이 저렴한 시기를 골라 곡물을 수입하는 전략을 세웠다. 값을 깎지 않자 판매상들은 앞다투어 관련정보를 나에게 주었고, 덕분에 경쟁 업체들보다 싼 가격에 곡물을 구매할 수 있었다. 나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고 시쳇말로 ‘여전히 배가 고팠다.’ 사실 나는 수출입담당 부서보다 영업 부서로 가고 싶었다. 고객과 직접 접촉하는 살아있는 현장 속으로 뛰어들고픈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산과 출신이 아닌 탓에 기획실로 발령이 났다. 한데 바람에 어긋나게 가게 된 기획실은 또 하나의 기회였다. 거기에서 보낸 1년은 회사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는 시간이었고 그를 통해 회사 운영의 큰 틀을 배울 수 있었다.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다고 했던가. 사실 이 시기는 나와 내 가족에겐 어둡고 긴 터널이기도 했다. 월급의 3분의 1은 사업 실패로 인한 빚을 갚는 데 나갔다. 역시 빚 때문에 아파트를 처분하고 월세집을 새로 구했는데 출퇴근 시간을 합하면 4시간이 넘었다. 새벽 6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역시 아내였다. 자신이 마련해온 집을 팔아 빚을 갚을 때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고, 늘 묵묵히 ‘하숙생 가장’ 뒤를 따라주었다.

가끔 통근기사를 자청한 아내가 모는 차 안에서 부족한 대화시간을 보충할 수 있었고, 나 역시도 토요일에는 당직을 자청했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회사로 오면 그나마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에서 웅크리고 자던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콧등이 시큰해진다.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어느 기업이 내 능력을 지금 월급의 2배로 산다면 남들 5배 이상의 일을 할 텐데.’ 그리고 다짐했다. 만일 내가 기업을 경영한다면 사원들에게, 첫째 다른 기업 2배 수준의 임금을 주겠고, 둘째 집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해주겠으며, 셋째로 정년퇴직 후에도 노후보장을 해주겠다고 말이다. 기업 입장에서 보자면 무리한 내용일 수도 있지만 이 세 가지 다짐은 여전히 변함없는 내 경영철학이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지만 내가 흘린 땀과 눈물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3년만에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했으며, 곧이어 경기도 이천 사료공장의 총무과장으로 옮겨갈 기회가 생겼다. 그 길던 터널의 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천에는 사택이 있기 때문에, 지옥 같던 장거리 출퇴근에서 해방될 수 있고 보증금을 빼 빚을 갚고 매달 내던 월세로 생활비에 보탤 수 있으니,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없었다. 이천행으로 생활의 안정을 얻었을 뿐 아니라 기업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천 공장에 총무과장으로 부임해보니, 총무, 생산, 영업의 세 부서 중 총무과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했다. 나는 공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업이고 다음은 생산이며 총무는 그 둘을 도와주는 보조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업부서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대리점 사장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도 들어보고, 고충처리센터도 만들었으며, 품질관리와 신용관리, 법무관리 등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약간의 오해와 시기도 있었지만, 내 마케팅 전략에 공장 직원들이 전적으로 동의해 주었고 대리점의 불평도 점점 사라지고 생산라인엔 활기가 넘쳤다. 그 결과 부임 3년만에 판매량이 3배 증가했으며, 영업실적, 생산성, 품질에서 모두 대상을 차지하는 쾌거도 이룩했다.

나는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새로 중국에 세워질 사료공장의 사장으로 내정되었다. 중국행은 이천행 이상의 기회와 도전일 것 같아 가슴이 설레었다. 하지만 그 무렵에 미원이 부도가 난 천호 마니커를 인수하면서 나의 중국행은 취소되었다. 93년 말 중국 발령이 내정되었는데 94년에 마니커의 영업부장으로 인사발령이 났다는 축하전하를 받은 것이다. 중국행에 건 기대가 컸기 때문에 실망도 컸다. 중국 발령을 원한다는 뜻을 계속 비췄지만 당장 마니커 영업부장으로 출근하라는 재촉만 돌아왔다. 나 역시 영업 부서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마니커 영업부장으로 근무하게 됐다. 닭고기와의 인연은 이렇게 사료에서 출발해 깊어져 갔다.

천호 마니커의 1일 평균 판매량은 부도 전에는 5만수, 부도 후에는 채 1만수도 되지 않았다. 첫 출근을 해보니 영업직 직원은 단 3명만 남아있었다. 그나마도 경험이 없는 직원들이었다. 우선 업무파악에 들어갔다. 제대로 된 서류도 없고, 미수금만 잔뜩 쌓여있었다. 하지만 목표만큼은 3개월 내에 기본 5만수 이상을 판매하겠다는 것으로 설정했다. 2월 업무보고 때 이런 내용을 브리핑했더니 사장과 임원들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있었다. ‘

마니커’의 품질과 ‘미원’이라는 브랜드를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리점 사장들을 끈질기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미원 마니커는 그해 4월에 4만수, 5월엔 5만수, 6월에는 6만수 판매를 돌파했고, 7-8월엔 1일 10만수 판매를 달성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런 추세라면 당초 내 계획대로 3년 후엔 1일 20만수 판매의 위업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장담했던 대로 미원 마니커는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면서 업계 매출순위 톱을 넘볼 정도의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절에 쌓았던 닭고기에 관한 정보와 지식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큰 자산이 되고 있다.

미원 마니커 영업부장으로 일하다 보니 닭고기 시장의 판세를 잘 읽을 수 있었다. 3년 후 하루 20만수 판매를 달성하려면 물량 소화를 위한 치킨 전문점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때마침 미원은 외식사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와 나는 추진 방법에 이견이 있었다. 나는 치킨이라는 상품 특성에 걸맞은 소형점을 주장했고 회사는 그룹 이미지에 어울리는 대형점을 주장했다.

당시에 대형 패스트푸드점 하나 여는 비용은 20억. 반면 거기에서 팔 수 있는 닭고기는 많아야 200수 남짓. 실익이 없었다. 회사의 윗분들을 설득했고, 결국 경기도 광명에 마니커즈라는 모델 숍을 개설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부 중역들의 계속적인 반대에 부딪혀 사업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미원이라는 브랜드 이미지, 미원연구소가 개발한 맛, 마니커라는 생산라인. 3박자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난 중대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도원결의’한 동기생 두 명과 막내 동생에게 ‘출정’ 채비를 갖추라고 일렀다. 이미 셋이서 여러 모색과 시도로 칼날을 벼리고 있던 차에 드디어 ‘올인’의 순간이 온 것이다.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100% 확실한 게 있나?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일었던 게 사실이다. 아내와 강릉으로 여행을 떠났다. 바다를 보며 많은 고민을 했다. 역시 아내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나를 믿겠다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돌아와선 사내 사업가 제도의 도입을 회사에 건의했다.

마니커는 판매처가 필요하고 나는 미원이라는 브랜드가 필요하니 서로 돕자는 게 그 골자였다. 또다시 일부 중역들이 이미지 실추를 염려하며 가로막았지만 마니커 사장이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95년 여름, 드디어 사업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그 때 갖게된 늦둥이 아들은 ‘복덩이’가 되어 회사와 나이를 같이 하고 있고, 사업과 집안의 후계자로 성장해 가며 나의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사업을 시작하려니 문제는 역시 자금이었다. 일단 오랜 막역지우인 ㅅ씨와 아내의 도움으로 기초자금을 마련하고, 여러 선?후배들에게 사업계획서를 보여주면서 성의껏 설명했더니 2천만원에서 5천만원의 투자를 받을 수 있어서 95년 9월 1일에 5억원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날 믿고 선뜻 투자했던 분들께는 지금도 감사할 따름이다.

사업시작을 결정할 때 열심히 기도했다. 사업이 성공하면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어려운 이웃과 나누겠다고 약속도 했다. 목사님은 이런 나에게 ‘제너시스(Genesis?창세기)’라는 회사명을 지어주었다. 이때의 약속을 지키려고 소년소녀가장과 장애우 돕기에 매월 일정액을 지원하고 있고, ‘닭 익는 마을’과 ‘U9’ 가맹점의 개점 당일 수입을 백혈병 어린이를 위해 쓰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그 2개월의 준비기간은 피가 마르고 애간장이 타는 시간이었다. 나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을 읊조리면서 일을 계속 밀고 나갔다. 브랜드명을 ‘BBQ(Best Believable Quality?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킨)’로 정했다. 매뉴얼을 만들고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가맹점 교육도 준비했다. 가맹점 지원을 위해 초기부터 본사 직원을 30명이나 두었다. 무엇보다 미원 연구소에서 개발한 독특한 맛이 있었다. 인프라만큼은 확실하게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10월에 가맹점 모집 광고를 냈다.

닭고기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을 때 왜 하필 닭고기냐는 반응이 많았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치킨 시장은 포화 상태고, 때문에 더 이상 들어갈 틈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치킨 시장은 ‘공백 시장’이라고 봤다. 기존 치킨점은 치킨을 안주의 하나로만 취급하는 호프집이 대다수였다.

호프집에서 치킨을 판매할 경우 가족 단위의 이용은 힘들다. 그런데 치킨은 바로 여성과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이런 이유로 승산이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 동의를 하고 직접 찾아온 고객이 있었다. 우리 BBQ 프랜차이즈 1호점인 경기도 전곡점 사장 부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프랜차이즈 1호점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려운 결단에 보답하는 길은 끝까지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리라. 모든 가맹점 사장들께도 매일 똑같은 다짐을 한다.

이렇게 시작된 BBQ 치킨은 그 맛과 독특한 마케팅 전략 때문에 날로 성장했다. 나는 한 달에 점포 25개를 개설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업계 최초로 고적대와 도우미를 동원해 이벤트 행사를 지원하고, 본사 직원이 전국을 돌면서 각 점포에 일주일간 상주, 점포 운영의 기틀을 잡았다. 그 결과 사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95년 말 16개이던 가맹점이 96년 6월 28일에는 드디어 100호점 오픈이라는 대기록으로 이어졌다.

물론 100호점 탄생까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일부 가맹점 사장들이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소비자에게 품질과 신뢰로 호소하기보다는 재료비를 낮춰서 낮은 가격으로만 승부를 걸자며 반발한 것이다. 나는 그들을 일일이 만나서 좋은 제품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이해시켰다. 가맹점 설득에 업무의 최우선을 두었다. 가맹점의 납득과 만족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고객에게도 확신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BBQ 자체가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품질(Best Believable Quality)’을 뜻하지 않는가. 이렇게 가맹점의 동의와 고객의 신뢰를 얻는 데 최선을 다한 결과, 그해 12월 200호점이 탄생했고, 다시 1년 뒤엔 430호점, 98년 3월엔 500호점을 개설하게 됐다.

BBQ의 고속 성장이 단순히 운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단일 품목으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박사 연구원을 보유, 맛을 개발하고 품질을 관리?개선하고 있으며, 제품 하나를 개발하면 2만명 이상의 일반인 시식을 통해 맛을 시험한다. 치킨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음식으로, 성?연령?지역?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이의 입맛에 맞아야 한다. 때문에 맛 테스트와 표준화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 역시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닭고기 한 마리를 먹는다. 내가 맛에 확신이 서야만 고객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너시스의 이 모든 노력과 노하우는 초창기부터 운영해온 세계 유일의 ‘치킨대학’을 통해 체계적으로 전수되고 있다.

프랜차이즈 사업은 절대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게 아니다. 브랜드화, 마케팅, 운영시스템, 물류시스템, 자금과 조직력, 이 모두가 잘 맞아떨어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제너시스의 프랜차이즈 사업은 새로운 한국형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창조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승승장구하던 사업도 IMF 앞에서는 고비를 맞았다. 사료 원료가 수입되는 상황에서 환율 급등은 큰 부담이었다. 우선 편지를 보내 가맹점 사장들을 안심시키고 간담회와 현장방문을 통해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모두들 아껴야만 살아남는다고 외친 데 반해 나는 적극적인 판촉투자에 역점을 두었다.

물론 뼈를 깎는 원가절감 노력도 있었지만 모든 여력을 개발과 판촉에 쏟아 부었다. 브랜드 이미지 제고를 위해 TV 광고도 동원했다. 서서히 투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때마침 일기 시작한 창업 붐이 겹치면서 가맹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소비자의 가벼워진 주머니 사정도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했다. 쪼들려도 외식 횟수가 곧바로 급감하는 게 아니라 일단은 싼 품목으로 전환되는 법. 저렴한 닭고기 소비가 증대되는 건 당연했다. 위기가 곧 기회였던 셈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연달아 시련이 덮쳤다. 먼저, 회사가 세무조사를 받았다. 가맹점의 인테리어 공사를 하청으로 관리한 것이 발단이었다. 공사비 절감으로 창업 가맹점주를 도우려는 선의였는데 세무처리가 서툴러 탈이 난 것이다. 근거자료를 제시하며 당국을 설득했고 결국 진실은 통했다.

다음엔 자연재해였다. 98년 여름, 공장이 수해를 당했다. 생산라인 중단으로 가맹점에 닭을 공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아우성이었다. 외식사업에서 고객의 주문에 응하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맹점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잠시 휴업하도록 했다. 그리곤 밤낮으로 복구작업에 매달렸고 그 덕분에 2주 이상 걸린다는 당초 예상을 깨고 3일만에 대부분을 재가동할 수 있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세 번째 시련이 밀어닥쳤다. 우리 회사와 불가분의 협력관계에 있었던 미원 마니커 회사가 매각된 것이었다. 새로운 마니커 회사는 우리에게 BBQ 상표를 내놓을 것을 종용했다. 어떻게 키운 회사인데, 야속하다 못해 서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6개월이나 끈 지루한 줄다리기는 결국 일부 비용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BBQ 상표는 지키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98년 한해는 말 그대로 격동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진실과 신뢰라는 조각배로 그 격랑을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었다.

99년 BBQ 사업이 다시 안정을 찾게 되자, 이제 사업다각화 계획을 실천에 옮길 때라고 생각했다.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또다시 변신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차기 프로젝트는 바로 한식 외식사업. 한식 닭고기 패밀리 레스토랑인 ‘닭 익는 마을’을 세상에 내놓았다. 한식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맛 표준화 작업이다. ‘한식은 손맛’이라는 편견이 두터워서 차별화된 특색을 알리는 게 쉽지 않았다. BBQ 치킨에 비해 성장 속도가 더뎠고 가맹점 사장들의 불만도 터져 나왔다.

40대 젊은 피를 사장으로 ‘긴급수혈’하고 참숯 닭불구이 전문점으로 특화시켜서 난관을 돌파할 수 있었다. 이제 닭요리도 삼겹살과 갈비를 대체할 수 있는 한식의 주류로 당당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03년엔 우동?돈까스 전문점인 ‘U9(유나인)’ 브랜드도 새롭게 선보였다. 전문 인력을 일본 현지에 파견해 맛을 연구,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퓨전 우동과 돈까스를 개발했다. 젊은 층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BBQ는 설립 4년 만인 1999년 10월에 국내 프랜차이즈 최초로 가맹점 1000호점을 돌파해 프랜차이즈 업계 신화를 창조했고, 2003년엔 1400개의 매장을 가진 국내 최대 프랜차이즈 업체로 성장했다. 현재 세계 최대 프랜차이즈인 맥도날드의 성장보다도 2배 이상 빠른 속도다. 나는 제너시스의 비전을 세계 최대?최고의 프랜차이즈 그룹으로 정하고 중국 시장을 그 첫 번째 타깃으로 삼았다.

중국 진출을 위한 합작 상대로 처음 접촉한 회사는 H그룹. H그룹은 이미 미국의 K그룹과 합작해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H그룹은 양국의 정서가 다른 데다가 유동인구수만 가맹점 입지조건으로 치는 미국식으론 중국 시장을 장악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우리 제너시스에 합작 의뢰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 K그룹의 반발은 생각보다 훨씬 컸고 합작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거기에 실망하지 않고 중국 최대 민영기업인 희망그룹 즉 둥팡시왕(東方希望) 그룹과 합작을 시도했다. 내가 희망그룹을 파트너로 생각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 제너시스와 성장사가 비슷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희망그룹은 사료사업으로 출발했으며 검소한 경영으로 유명한 회사였다. 나는 자신을 갖고 희망그룹 류융싱(劉永行) 회장을 만났다. 내가 사업에 관한 설명을 하자 류 회장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2시간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말미에 정곡을 찌르는 질문 몇 개를 던지는 게 아닌가. 동석했던 우리 임원진은 류 회장의 태도에 적잖게 실망한 눈치였지만 나는 드디어 해외 진출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2002년 10월 류 회장은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해 BBQ 가맹점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우리의 협력작업은 급속도로 진척됐다. 사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은 물론 세계 유수의 그룹들도 희망그룹과 합작하길 희망하며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희망그룹이 선택한 것은 바로 제너시스의 프랜차이즈 시스템이었다.

자본금의 절반씩을 투자해서 합자회사를 설립, 중국에서 BBQ 브랜드로 닭고기 패스트푸드점을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희망그룹의 인지도와 브랜드 파워, 제너시스의 프랜차이즈 경영 노하우를 결합시킨다면 2010년까지는 1만개의 BBQ 매장을 개설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그치는 게 아니다.

나는 중국뿐 아니라 미국, 일본, 독일, 이집트, 호주, 뉴질랜드 등 세계 여러 나라들로부터 마스터 프랜차이즈 요청도 받고 있을뿐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공략할 계획도 갖고 있다. 2020년엔 제너시스가 전 세계에 5만 개의 가맹점을 가진 세계 최대?최고의 프랜차이즈 그룹이 될 거라고 자신한다.

프랜차이즈의 미래는 밝다. 프랜차이즈는 선진국형 유통기법이자 20세기 최고의 혁신적인 경영기법이다. 더구나 부존자원이 필요 없는 지식산업이다. 따라서 이런 프랜차이즈 산업이 정착, 활성화될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장치들을 구비하고 정비해야 한다. 나는 한국프랜차이즈협회장으로서 프랜차이즈의 기반 조성과 도약을 위해 더욱 매진할 것이다.

8년, 그 동안 제너시스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그 뒤에는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아내, 나의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성향 이면에 숨은 진실을 믿고 따라준 제너시스의 임직원들, 이제는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일단은 지지를 보내주는 가맹점 사장님들이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너시스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또 하나의 약속을 하고 싶다. 제너시스의 찬란한 날갯짓은 지금부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