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랑한 함경도 아바이 -이양구 회장

◇ 파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너 자신이다 ◇

1983년 8월 16일. 여느 때처럼 새벽같이 일어난 이 회장은 만년필로 굵직굵직하고 네모반듯하게 수첩에 글 자를 적고 있었다.

오늘 이사회에서 발표할 메시지였다.

‘요즘은 한 달이 하루 같고 하루는 한 시간 같아.’ 회사 일과 사회사업 구상으로 최근 그는 부쩍 바빴다.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를 찾아가 는 상황에서 그는 기업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대한 로마제국도 시간이 지나니까 모두들 해이해져서 결국 망하고 말았지. 바닥에서 차고 올라 지금은 상승 곡선이지만 극점을 지나면 또 하강하기 쉬워.’ 그래서 그는 오늘 이사회에서 동양그룹이 나아가야 할 근간에 대해 숙고를 거듭했다. 언제나처럼 정확히 9시에 이사회가 시작됐다.

그날의 주요 안건은 이번에 새롭게 들여오는 시멘트 기계를 정하는 문제였다. 이사들의 토론 결과 독일의 폴리시우스사 제품으로 결정됐다. 이윽고 이양구 회장이 메시지를 발 표할 차례가 됐다. “동양은 어려운 고비를 막 넘겼습니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나아가느냐, 그 방향을 올바르게 설정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동양 이 가야 할 근간을 무엇에 둘 것이냐. 첫째 믿음이 있는 회사, 둘째 단결하는 회사입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좋은 제도를 도입하고, 훌륭한 인력을 배치하는 것 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도전적인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언제나처럼 우렁우렁한 회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기가 회의록을 정리했다.

그러나 그날 그 자리가 이양구 회장과 함께하는 마지막 이사회라는 사실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마지막 이사회 이사회가 있고 이틀 뒤 아침에도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도전적인 자세다.

’ 이 회장은 수첩에 쓴 자신의 반듯반듯하고 굵은 사각형 글씨를 내려다보며 되새겼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꺼풀이 떨리고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잠이 적은 이 회장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아무래도 요 며칠 너무 무리하신 것 같습니다.

잠깐 쉬시는 게 어떨까요?” 오랫동안 이 회장을 보필해온 오 기사가 걱정했다. 사우나라도 한번 할까? 땀을 좀 빼면 좋을 것 같아.” 점심식사를 마친 이 회장은 근처 사우나탕으로 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뭉친 근 육이 풀리며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몰려 왔다.

그는 그대로 살포시 잠이 들었다.

“회장님, 이제 일어나셔야겠습니다.

오후에 약속이….” “응, 그래.” 이 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아니 대답하려고 했다. 그런데 말이 안 나왔다. 입술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떴다. 오 기사가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회장은 일어나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회장님,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내가 왜 이러지? 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지?’ 목이 탔다. 그러나 ‘물’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 기사가 재빨리 물을 떠와 이 회장에게 먹여줬지만, 삼킬 수가 없었다.

1983년 8월 18일 오후 2시쯤이었다.

86년 여름. 전북 익산시 영등동의 동양제과 제3공장의 초코파이 생산 라인 앞으로 휠체어를 탄 노인이 다가간다. 백발의 노인은 라인 앞에서 휠체어를 멈추고 망연한 눈길로 눈앞을 스쳐가 는 초코파이 대열을 바라봤다.

그의 뺨 위로 어느새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길고 긴 투병을 해온 이 회장의 모처럼 만의 외출이었다. 의식과 신체는 어 느 정도 회복됐지만 언어장애는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러닝셔츠 바람으로 논두렁을 뛰 어다니며 공장 짓기에 골몰하던 시절이 언제던가. 서해를 바라보며 중국 진출을 예견했 던 일이 엊그제 같다. 늘 남이 쓰던 공장을 인수해서 썼고, 사옥조차 임대로 썼던 이 회 장으로서는 최초로 대지 위에 직접 건물을 올린 익산 공장이 각별했다.

직원들은 그런 노회장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이양구 회장은 서해를 바라보았다.

‘뱃길이 열릴 거야. 커다란 시장이 열릴 거야. 그러면 그때 중국으로 가야지. 학교도 세워서 똑똑한 젊은이들을 많이 키워낸 중국으로, 유럽으로, 미국으로 보내야지. 그래서 죄다 메이드 인 코리아로 덮어버려야지.’ 눈빛만이 살아 있을 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그는 회복 뒤에 할 일을 생각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을까. 잠결에 물소리가 들려왔다. 첨벙첨벙 무엇인가 뛰어오르는 소리도 들린다. ‘송어 떼가 돌아오는 구나….’ 햇빛에 반사돼 반짝반짝 빛나는 성천강의 수면에 송어 떼들이 뛰어오른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송어 떼의 유영이 힘차고 아름답다. 파란만장한 운명 앞에서 꺾이지 않고 맞 서온 자신의 인생 또한 그러하지 않았던가. 물길을 따라가자 만세교가 보인다.

누군가가 탄 자전거가 달린다.

자전거 위에는 설탕 포대가 실려 있다.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물드는 함흥 시가지의 대로변을 통과하고, 어느 새 불빛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남대문 시장통을 달리고 있다.

탕! 탕! 탕! 총알이 빗발친다. 폭발음이 들렸다가 사라진다. 구슬픈 유행가요가 들려오 고, 피난열차가 지나간다. 눈발이 날린다. 뜨거운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려 녹아버리는 눈 발. 페달을 밟고 있는 발에 힘이 빠진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 가족들의 얼굴, 시노자 키 사장의 얼굴이 스친다.

“사업은 절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되어선 안 되네. 남을 이롭게 하고, 자네가 속한 사회에 공헌이 되는 것이어야만 하네. 부디 이 사실을 잊지 말게.” “이양구 수형 거래를 모릅니까?” 시원시원하게 외쳐대는 말소리, 커다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느새 마음속의 자전거는 초코파이 생산 라인 위를 달리고 있다.“100미터는 넘어야 된단 말이오! 1000억원은 바라 봐야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파도 소리가 들린다.“큰 바다가 되겠다. ” 젊은 시절의 목소리가 파도에 맞서듯 우렁차게 울린다.

만세교에서 출발해 삼척의 공장을 뛰어넘고 다시 초코파이 생산 라인 위를 달리던 자전거는 다시 고향 함흥에 이르는 순간, 하늘로 붕 날라 올랐다.

오리온 초코파이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킨 동양그룹의 창업주. 숱한 시련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칠전팔기 정신으로 다시 재기해 오늘날의 기업을 이룬 집념의 경제인. 이양 구 회장은 89년 말까지 제조와 식품 부문을 비롯해 19개 계열사와 1개의 공익법인을 포 함, 총 20개사로 구성된 동양그룹을 이룩했다.

이양구보다 더 큰 기업을 이룬 사람은 많 지만 그만큼 숱한 역경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고 또다시 일어서 성공을 거머쥔 인물은 드물다.

‘나의 희망은 특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대단한 인물을 구해서 어마어마한 일을 꾸미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각자가 자각해서 자기 분수를 지킴으로써, 또 서로 간에 협력함으로써 회사를 평화롭게 발전시켜 나가자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의 지가 되는 이런 회사에서 업적을 쌓아, 역사를 장식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나의 희망 인 동시에 기업관이기도 하다. 기업이든 세상이든 결국 사람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희망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89년 10월 18일 오후 6시. 서남 이양구 회장은 향년 7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