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보다는 제대로 된 자장면을 만들자” - 이문길 대표

재주가 많았던 선친은 농사를 아주 잘 지었다. 남보다 단위면적당 소출도 훨씬 많았고, 기와집도 잘 만들었다. 그런데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늘상 남의 소작이나 치며 살았다. 그래서 이문길은 중학교 마치고서 아버지 손 잡고 중국집에 가서 주방 보조로 취직했다. 35년 수타 자장면 인생의 시작이다. 가난 탈출이 애시당초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목표가 수정됐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손님이 먹어보고 눈물을 흘릴” 자장면 만들기. 왜냐고? “21세기가 기다리니까.” 자, 자장면을 만들다가 철학자가 된 빈농의 아들 이문길 이야기다.

서울 효창공원 옆에 있는 자장면집 신성각 유리창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단 한 그릇 먹어보고 눈물을 흘려줄 음식을 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만들고 싶다. 21세기가 기다리고 있기에. 88년 10월 이문길”

돈보다는 제대로 된 자장면을 만들자

테이블 딱 네 개에 메뉴도 잡채랑 탕수육 빼곤 번듯한 요리 하나 없는 이 자장면집에서 이문길은 아내 지선이와 함께 그런 장엄한 자장면을 만든다. 이문길이 말했다. “그렇게 작심한 건 벤 존슨 덕분”이라고.

“올림픽, 서울 올림픽 때 벤 존슨이 약물 먹고 메달 뺏기고 쫓겨갔잖아요. 그 사람이 황급하게 공항을 나가는 걸 보고 있는데, 야, 저 사람은 메달 욕심에 저렇게 됐구나. 그렇다면 나도 돈을 위해서 자장면을 만들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고 저 글을 쓴 거예요. 한 그릇을 팔더래도, 이거 한번 제대로 해보자, 돈만 벌려고 할 게 아니라, 뭐 그런 거.” 가게가 문을 연 게 1981년이니, 27년 세월 동안 가게는 두 배로 확장됐다. 평수는 3평에서 8평, 그리고 식탁 수는 2개에서 4개로 두 배! 하지만 지난(至難)한 품질과 매력적인 돈 사이에서 품질을 택하기에는 옹색하기 짝이 없는 규모요, 현실감 없는 사장 아닌가.

1.5배 늘어난 사병식당 쌀 소비량

이문길은 고향이 경남 거창이다. 소작농인 아버지 밑에서 6남1녀 셋째 아들이었다. 언급했다시피, 가난하기 짝이 없는 시절이라 그는 중학교 마치고 자장면집에 취직했다. 아버지가 데려간 식당에서 시험을 봤는데, 물 담은 자장면 그릇을 나무배달통에 넣고 자전거 뒤에 싣고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이다. 물이 가장 많이 남은 아이가 합격. 그게 이문길이었다. 그리고 기술을 배웠다. 아니, 가르쳐 주지 않는 주방장들 눈을 피해 밤마다 몰래 기술을 복습했다.

이어서 군대를 갔는데, 주방장 출신 취사병이 오자 사병식당에서는 며칠 사이에 쌀 소비량이 50%가 늘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장교식당으로 쫓겨가고, 장교식당에서 사단장 관사로 또 끌려가는 보직 강제 이동으로 실력을 입증받고 제대했다. 이제 제대로 취직할 수 있겠다, 그리 생각하였다.

소 두 마리 밑천 삼아 창업하다

사회로 돌아와보니 옛 동료들은 모두 자기 가게를 만들어 돈을 벌고 있었다. 집도 사고, 없던 아기도 생겨 재미나게 살고 있었다. 취직해서는 아니되겠다 라고, 위기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찾아갔어요. 내 가게 내게 소 팔아서 자금 좀 대달라고 졸랐죠. 하루 단식하고 사흘 드러누워서 안 그러면 죽어버리겠다고 했죠.”

아버지는 “그러면 죽어라”고 했다. 자식들 잘 되라고 소 팔고 땅 팔아 돈 대줬다가 집안 쫄딱 망한 꼴 본 게 몇 번인데!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버지께서 결국 소 두 마리를 끌고서 같이 장에 갔어요. 지금도 그날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요. 팔기 싫어서 소들한테 질질 끌려가던 모습….” 1981년 당시 거금인 250만원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 가게를 냈다. 지금 자리 바로 옆이다. 이름은 신성각. 업종은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면발은 만드는 수타 자장면으로 정했다. 돈이 좋았다. 이제 돈을 벌 것이다.

물도 안 나오는 동네에서 20년

“청계천에서 일할 때 공해랑 소음 때문에 고생을 했어요. 그래서 공기 좋아서 요기에 자리를 잡았죠.” 그런데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물을 물쓰듯 해야 할 중국집에 물이 없다니. 공기는 좋았지만 언덕받이 후미진 곳에 손님이 있을 리도 없었다. “살기는 딱인데, 장사로는 빵점인 입지”라고 했다. 그리하여 낮에는 없는 손님에게 자장면 만들려고 고생, 밤에는 아랫동네에서 물을 사서 오느라 생고생을 하며 살았다. 그러다 아내 지선이를 만났고, 두 사람은 남매 둘을 낳고서 악착같이 일했다. 돈 벌어서 부자 되려고.

선(禪)처럼 다가온 무소유(無所有)

그러다가 88올림픽 때 벤 존슨 사건이 터진 것이다. 고까짓 메달 하나를 탐욕해 인생을 망친 존슨. 나도 그리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돈 돈 돈 하고 살았죠. 술도 팔고, 사람들 유혹하려고 자장면에 조미료랑 설탕 팍팍 쳐서 내놓고요. 그런데….”고등학교 입학 대신에 ‘택해진’ 자장면 인생. “그때만 해도 자장면 만들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내 인생 걸고 하는 일인데, 그렇다면 너무 편함만 찾는 건 틀린 게 아닌가, 돈이라는 게, 천원 있으면 막걸리 먹으면 되고 십만원 있으면 양주 먹으면 되고, 취하는 건 똑같고….” 등산과 운동으로 온몸이 근육덩이인 사내가 자분자분 말을 잇는다. 운동은, 하루 종일 찜통 주방에 서서 밀가루반죽을 치려면 필수라고 했다. 그래서 체력과 인내심을 내서 지금 수타면을 업으로 삼을 수 있는 대한민국 청년은 없다고도 했다. “글세, 몽골에는 있을 거요 틀림없이. 거기는 힘도 세고 하니까.”

“한 개인이 30년 넘도록 자장면을 만들었다면, 그 자장면은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먹는 사람이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정말 남이 울고 싶을 정도로 맛있고 소화 잘 되는 자장면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하여 ‘신속배달’이라고 적어놨던 앞 유리창에 저리 장엄하고 파격적인 글귀가 붙게 된 것이다. 이후 신성각 수타 자장면은 조미료와 설탕과 카라멜이 뿌려대는 감칠맛이 사라지고, 옛날자장면 마니아들과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의 성지(聖地)로 변했다.

주류 판매 일체 금지

고량주, 혹은 지독한 이과두주 한 잔 털어넣고 캬, 하며 양장피 집어먹기. 그런 풍경을 신성각에서 볼 수가 없다. 그 세 가지 메뉴가 아예 없다. 술? 기본적으로 없다. 팔지도 않고 반입도 금지다. 요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잡채와 탕수육 이렇게 딱 두 가지. 메뉴판에 모든 게 적혀 있다.

“이 좁은 곳에서 어른들이 잔 탁탁 던지며 술 마셔봐요. 애들이 자장면 먹고 싶은가. 나는 자장면 만드는 사람이지, 술 파는 사람이 아니죠. 밖에 가면 어른들 술 마실 곳 많잖아요?옛날엔 나도 팔았죠. 하지만 밖에 저 글 적어놓은 뒤로는 술 안 팔아.” 영업면에서는 진짜 낙제다. 메뉴판에는 또 이런 말도 적혀 있다.

영업 시작 11시37분 영업 종료 8시30분

37분? “마누라랑 아침에 일어나서 8시부터 양파 썰고 밀가루 반죽하면서 하루 준비를 하면 대충 11시 35분쯤에 끝납니다. 그러면 2분 정도 쉬다가 문을 여는 거죠. 어김없어요.”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들쪽날쪽이라면, 나중에 자장면에 들어 있게 될 재료의 함량이며 무게며 기타 등등도 들쪽날쪽이 될 터이니, 이 또한 단순한 자기 과시만은 아니다. 이문길은 ‘정확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요일은 무조건 쉰다. 정확함, 또 있다.

배달 시간 100% 준수, 시계가 두 개

“어떤 공장에 한시까지 배달가야 했었죠. 그런데 시계가 고장난 거예요. 몰랐죠. 그래서 배달 늦었어요.” 그 뒤로 이문길은 시계를 하나 더 사서 벽에 나란히 걸어놓는다. “시차를 두고 건전지를 넣었어요. 그러면 느린 시계는 틀린 겁니다. 자장면 하나 먹겠다는 손님을 무작정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거죠.”

면의 특성상, 수타면은 금방 불어버린다. 그래서 이문길은 가게 주변 반경 50미터 안으로 배달 범위를 묶어버렸다. 그 너머로 가버리면 자장면이 불어터져서 못먹게 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영업 점수 낙제.

동업 싫어…5억 투자 제의도 거절

몇 남지 않은 수타면 기술자다 보니, 동업에 스카우트 제의도 “엄청” 많다고 했다. “몇년째 괴롭히는 사람도 있어요. 5억원 댈 테니까 같이 일하자, 규모 큰 레스토랑 만들자 뭐뭐뭐…” “그래서 어떡하셨어요?” “몽땅 거절했죠.”우선은 수타면의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거절. “사람이 만드는지라, 하루에 만드는 양이 한계가 있어요. 규모가 커지면 수타라고 해놓고 뒤로는 기계를 써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사람 죽어요.” 무엇보다 돈의 노예가 되기 싫다고 했다.

“돈에 맞춰 살면 되는 겁니다. 편하다는 것이, 음과 양이 있는 거 같아요. 마냥 편하다고 몸이나 마음이 똑같이 편하지 않는 것이고, 그저 편안함도 적당히 합리적으로….” “그러면 사모님이랑 자녀분이 싫어하지 않나요?” …사내가 빙긋 웃는다. “평생 나 이렇게 사는 모습 보고 살았으니까, 애들은 그렇게 살 거 같습니다. 우리 마누라는 원래 돈 돈 돈하는 사람인데….”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아내 지선이를 이문길이 바라본다. 부부가 서로 빙긋 웃는다. 염화미소다. 니가 무슨 말 하는 지 다 알고 있다는, 정분 가득한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