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과 "칭찬의 경제학"

BC 496년 월(越)나라의 왕 구천(句踐)에게 패하여 아버지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죽자 그의 아들인 부차(夫差)는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출입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하고 외치게 하며 원수를 갚기 위해 노력한 결과 월왕 구천을 크게 무찔렀다.

이번에는 회계산에서 농성을 하다 결국 포로가 된 구천 내외와 신하 범려(范　)가 갖은 고역과 모욕을 겪은 끝에 영원히 오나라의 속국이 될 것을 맹세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돌아와 자리 옆에 항상 쓸개를 매달아 놓고 앉거나 눕거나 늘 이 쓸개를 핥아 쓴맛을 되씹으며 “너는 회계의 치욕〔會稽之恥〕을 잊었느냐!”하며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이러한 절치부심하는 노력 끝에 20년 후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쳐서 이기고 오왕 부차로 하여금 자살하게 한다.

위의 고사가, 그 유명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인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안다. 그런데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 화식열전(史記 貨殖列傳)>에는 그 뒷 이야기가 나온다. 즉 회계산에서의 치욕을 씻는데 성공한 재상 범려는 이러한 성공 이후 재상 자리를 던지고 산동성 쪽으로 숨어 들어가서 이름을 주공(朱公)이라고 고치며 그의 인생을 크게 바꾼다. 그는 이 산동성 일대야말로 천하의 중앙으로, 사방으로 제후의 나라에 통하고 화물이 교류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여 산업을 시작하고 화물을 축적했다가 시기를 보아 내다 팔아 이익을 거두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19년 동안에 세 차례나 천금을 모아 2차나 그것을 분산시켜 가난한 교우나 소원해진 형제들에게 분배했다. 그의 자손들도 가업을 이어받아 수 만 금을 모았다. 사마천은 이것을 '이른바 부유해지면 즐겨 덕을 행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부에 관해서 말할 때는 모두들 의례 이 주공을 예로 든다고 그의 화식열전에서 설명한다.

사마천

동양 최대의 역사가인 사마천에게는 정치인들 못지 않게 돈을 많이 모은 부자들의 이야기도 관심이 높았다. 그들이 정치를 어지럽히지 않고 남의 생활을 방해하지도 않고 때맞춰 재산을 늘이고 부호가 된 뒤에 특별히 그 재산을 아끼지 않고 남을 도우는 경우, 이를 아름답게 보고 그의 화식열전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사마천은 벌써부터 자본주의의 본질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 이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정치가에 버금가는 덕목이라는 것이다.

영국 더 타임스의 자매지인 영국의 선데이타임스는 지난 4월 말에 <2006 영국 부자 명단>을 발표한다. 이른바 "영국 최고의 부자는 누구인가?" 이다.

영국 최고의 부자는 인도 출신으로 런던에 본부를 둔 철강산업가 락시미 미탈이라고 한다. 그의 재산은 148억 파운드, 미국 돈으로 하면 265억 달러이니까 우리 돈으로 하면 25조원쯤 되는 돈이다. 올해 55살의 미탈 회장은 현재 유럽 최대의 철강그룹인 아슬러를 186억 유로에 인수하려고 하고 있어 본사가 있는 룩셈부르크나 스페인, 프랑스 등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두 번째 부자는 프로축구 첼시구단을 갖고 있는 러시아의 석유기업가 아브라모비치로서, 108억 파운드, 세 번째 부자는 순수 영국인인 제랄드 그로스버너 웨스터민스터 공작, 그는 런던 일대에 알자 부동산을 대거 소유하고 있어, 지난 1년 동안 부동산 값이 10억 파운드나 오른 덕에 총 재산이 66억 파운드에 이르고 있다. 우리 돈으로 치면 10조 원에 이른다. 그 다음 사람들은 우리가 잘 모르는 이름들이고, 9위에 오른 리차드 브랜슨 경은 우리가 모험가로 기억하는 사람인데 그의 재산이 30억 파운드 쯤 된다고 한다. 이 명단에 따르면 상당히 부자인 것으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3억 파운드, 곧 5천억 원 정도로, 192번째 부자로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누가 돈을 가장 많이 갖고 있나, 얼마를 갖고 있나 하는 정도이지만, 5천 억 원이던 5조 원이던 우리는 그 규모가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다만 이런 명단을 발표하면서 선데이 타임스가 분석한 기사가 재미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론들은 이런 분석을 지나치고 있다.

선데이 타임스는 영국에서 'billionaire', 곧 10억 파운드 이상의 재산을 사람은 54명에 이르는데, 이들은 꼭 영국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영국이나 영국 속령에서 태어났거나, 영국에 살고 있거나, 영국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을 다 포함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 20명은 영국에 이민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영국이 그만큼 부자들이 안심하고 이민해 들어오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선데이 타임스는 분석한다.

선데이 타임스가 펴낸 <2006 영국 부자 명단>은 104 페이지에 이르는 데, 이 명단에는 단순히 부자의 명단만이 아니라 갖가지 흥미 있는 분석자료들이 실려있다.

우선 영국 최고의 부자 1000명이 갖고 있는 재산은 3천9억 파운드에 이르는 데, 이 재산은 지난 해 2천496억 파운드보다도 20%이상 늘어났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중에 가장 높은 증가율이라는데, 그만큼 영국에 부자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또 그 부자들의 재산이 늘어난 셈이다.

그런 흐름에 부응하듯 런던의 금융산업은 막대한 수익과 이에 따른 보너스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골드만 삭스로 대표되는 금융자본과 그로부터 교육을 받은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큰 돈을 벌어왔다는 것이다. 런던은 과연 헤지펀드의 천국이며, 그들은 전 세계를 상대로 돈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들이고 있음이 이번에 드러난 것이다. 여기에 72명의 부호들은 영국령 섬나라에 조세피난처를 마련하고 각국에서 올린 막대한 수입을 조세피난처를 통해 확보함으로서 영국의 부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또한 축구선수나 패션스타, 팝가수, 영화배우 등 연예스포츠 산업에 종사하는 30살 이하의 젊은이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축구선수가운데는 레알 마드리드와 잉글랜드 배표팀인 데이비드 베컴부부가 8천7백만 파운드로 가장 많지만 올해 스무살의 웨인 루니가 급속도로 추격하고 있어, 올해 월드컵대회에서의 활약에 따라 베컴을 따라잡을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이다. 해리포터 영화시리즈의 주인공인 16살의 대니얼 래드클리프도 벌써 천4백만 파운드의 재산가로 성장했다는 소식이다.

그런데 이런 소식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선과 기부금이 일년 사이에 36%나 늘었다는 소식이다.

가장 돈을 많이 낸 사람은 톰 헌터 경으로 '클린턴-헌터 개발계획'에 5천5백만 파운드, 약 8천억 원을 내었고, 레오 노 라는 부호는 '레이첼 자선재단'에 2천250만 파운드, 즉 약 4천억 원, 세 번째는 조한 에리아쉬라는 부호가 '아마존 열대우림 보호'에 2천만 파운드를 내놓았고, 가수인 엘튼 존은 '엘튼 존 에이즈재단'에 천2백만 파운드를 내었다. 그는 미국과 영국을 돌며 시간이 나는 대로 자선을 실행하고 있다. 유명한 기타리스트이며 가수인 에릭 크랩튼은 지난해 수입의 일정액을 자선금으로 내놓으면서 콘서트나 행사를 기부금 모금에 활용한다. 지난해 뉴욕에서 그의 악기 등을 내놓은 경매행사에서 5맥만 파운드를 조성해 이를 마약중독자 재활센터에 보냈다. 폴 매카트니나 U2,마돈나 등의 이름을 자선행사에서 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이러한 기부금이나 자선 출연을 가장 많이 한 상위 30명의 출연총액은 4억5천3백만 파운드로서 일년 전에 비해 1억2천만 파운드나 늘었다.

개인만이 아니다. 영국 사회의 자선기부도 크게 늘었다고 선데이 타임스는 전한다. 인도네시아 지진해일피해가 일어났을 때에 처음 두 달 동안 3억4천만 파운드를 모금한 영국인들은 아프리카와 영국의 기아해방을 위한 '빨간 코의 날' 행사를 통해서 3천7백만 파운드를 모았다. 이러한 자선과 기부행렬에는 수많은 영국인들의 이름이 등재되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만을 돕는데 머무르지 않고 공익목적의 각종 사업에 마음과 정성을 쏟는다. 스코틀랜드의 최대 부호인 파울 펜테너는 4년 안에 1억 파운드를 내겠다고 서약을 했다고 한다. 환경을 지키고 건강을 지키는 사업에 쓰라는 뜻이란다. 일년 동안의 자선출연 총액은 82억 파운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도 전년도에 비해 11억 파운드나 늘어난 것이다.

선데이 타임스는 이러한 자선과 기부행렬을 주요 뉴스로 분석하고 있다. 신문기사에서 박애재단의 스티븐 에잉거 사무총장은 "부자들은 점점 더 박애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합니다. 그 활동은 때로는 사회적인 큰 관심사를 지원하거나, 사회적인 투자를 하거나, 박애활동에 개인적으로 참여하거나, 때로는 사람들의 요구에 직접 응하는 것 등입니다. 큰 손을 내미는 부자들은,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환경과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그런 사회적인 지도자들의 하나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4월 23일자 영국 선데이 타임스가 발표한 <2006 영국부자명단>은 단순히 누가 돈을 더 많이 갖고 있느냐의 통계발표가 아니라 영국인들이 부자와 부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불행히도 우리 언론들이 그 의미를 깊이 파고들지 못했지만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는, 세계 각국에서 많은 자본이 영국으로 몰려드는 현상과 그러한 현상을 가능하게 한 영국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그러한 부에 의한 사회의 성장, 그리고 그것이 자선사업이나 박애활동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칭찬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가슴아픈 일일지 모르지만, 헤지펀드나 조세피난처를 통한 부의 획득까지도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라면) 인정하면서, 그것이 영국사회의 부를 늘이고 그 부가 영국과 인류를 위해 소중하게 쓰여지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2천여 년 전 중국의 사마천이 그의 <사기 화식열전(史記 貨殖列傳)>에서 설파한 '자본주의의 정신' 그것이다.

세계의 돈을 영국으로 모으고 그 돈으로 또 돈을 새끼쳐서 부를 늘이고, 그런 가운데 그 사회는 보다 많은 선한 일에 부를 사용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어느 나라처럼 기업의 총수가 갑자기 해외에 나갔다가 억지로 돌아오거나 8천억 원이니 1조 원이니 사회에 헌납을 발표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의 경제단체연합회 회장이 말한 '칭찬의 경제학'일 것이다. <국부론>을 지은 아담 스미스의 나라 영국은 과연 사마천도 탄복할만한 "신국부론"을 이미 현실에서 실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